스토리

가정교회가 어렵다고 느낄때(가정교회사역원 펀글)

just do it again 2012. 3. 21. 13:43

저는 가정교회를 해오면서 이 공동체 정신이 단계마다 어디에 왔을 때 가정교회가 즐겁고

쉬워진다고 느끼는가, 어느 단계에 우리가 왔을 때 가정교회가 어렵고 힘들게 느끼는가를

생각해봤습니다. 적어도 다섯단계가 있다고 봅니다. 목장을 중심으로 생각한 것을 써볼텐데

우리 목회자들은 우리의 목회현장으로 대입하여 생각해봐도 좋다고 봅니다.

 

첫번째 단계는 목자 목녀 자신이 섬김의 마인드로 체질화되어있지 않은 단계입니다.

제가 볼 때 목장사역이 잘 안되는 변수에서 결정적인 것은 목자 목녀가 목원이나 VIP를 섬기는 일

이전에 자기 자신들의 내면의 문제가 해결이 안되거나 묶여있는 것입니다. 리더의 개인영성이나

개인습관, 부부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사역을 하거나, 사역의 동기가 섬김이 아니라,

사역을 통해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이 많을 때, 목장은 정체기나 침체기로 빙빙 돌게 됩니다.

이런 경우, 목자 목녀가 목원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목원들이 목자 목녀를 걱정하는 일도

왕왕 발생합니다. 리더가 자기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을 때는 그 섬김은 형식적이 되고 자연히

효과적으로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때는 목장에 VIP정착율이 거의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한 가정에서 가장의 안좋은 개인습관이 해결이 안되면 그 가정은 모든 일이 그 문제로

귀착되고 맙니다. 목장사역이 잘 안되는 경우, 대부분 목자나 목녀의 개인문제 미해결로 인하여,

목원과 VIP섬김이 사실상 안되는 것입니다. 목자 목녀 자신이 남의 필요에 집중할 수 없고, 오직

자기 필요에 빠져있는 상태,이때 공동체는 침체기이며 바람빠진 타이어같은 상태가 됩니다.

가정교회가 잘 안될 때, 아니 어떤 공동체든지 뭔가 잘 안돌아갈 때, 가장 큰 이유는 리더의

자기문제 미해결, 바로 여기 있은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목자 목녀 부부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목장모임에서는 진솔한 나눔의 분위기 자체가 어렵게 됩니다. 그때는 진솔한 오픈이 안되고

모든 나눔이 에둘러 말하는 피상적 겉돌기가 되어버립니다. 예컨대 목자 부부가 현재 갈등 중인데,

그들이 본인들 문제를 뛰어넘어 깊은 나눔을 하거나 VIP 섬김에 집중하기는 너무 힘듭니다.

제가 볼 때 목장이나 교회에서 뭔가 잘 안되어보이는 많은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봅니다.

리더의 영성이나 삶이 아직 성숙으로 안착되지 않아,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지 못한 상태입니다.

리더가 자기 성찰도, 자기부인도 잘 안되는 상태, 마치 아브라함이 자기 목숨과 안위를 생각하여

거짓말로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고 두려워하는 단계, 또는 하갈을 취한 후에, 부인 사라와 불화를

겪는 단계 정도에 해당할 것입니다. 또한 야곱이 열한번째 아들을 편애하여 열명의 아들 모두에게

질투와 경쟁을 유발하는 그런 수준에 해당합니다.

이 단계의 가장 큰 문제는, 목자 목녀들이 자기들의 문제가 어디에서 기인하고 있는지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로 이들은 외부적 환경 탓을 많이 합니다. 이럴 때는 개인적인 상담이나

부부상담으로 그들 문제를 세심하게 도와주는 목회적 도움이 필요합니다.

 

 

두번째 단계는, 공동체 안에서 오직 목자 목녀만 섬기는 일에 헌신하는 단계입니다.

이것은 그 목장에는 목자 목녀 외에는 다들 영적으로 어린아이들만 모여있는 경우입니다.

어린아이라는 것은, 섬김의 주제가 파악이 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개척가정교회에서

목사와 사모가 헌신적으로 섬기는데, 아직 열매가 없는 경우가 이 단계입니다.

목장에서 때로는 목자는 섬기는데, 목녀는 그렇지 않다든지, 목녀는 섬김으로 애쓰고 있는데

목자가 아직 그렇지 않다든지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것은 아직 목자나 목녀 둘 중 하나는

첫째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경우이겠죠) 목자와 목녀 둘다 섬김으로 헌신한다 하더라도 그외

목장의 다른 멤버가 섬김의 사역에 뛰어들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목원들이 아직 스탶의 마인드가

아니라 고객의 마인드로 되어있음을 의미합니다. 공동체는 기다림과 인내의 상태입니다.

복음서의 예수님의 열두제자들의 공동체나 모세가 이끌던 출애굽 광야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이 그림에 신학적으로 꼭 맞는다고 할 수는 없어도, 예수님만 섬김의 마인드를 갖고, 제자들은

섬김의 마인드 장착이 안되어있습니다. 예수님만 기도하시고 희생하시고, 나머지 제자들은 그냥

따라가기만 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인도할 때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전통교회 개척교회의 경우 대부분 목사님과 사모님만 몸이 휘어지게 섬기고 몇 안되는 성도들은

섬김도 헌신도 하지 않아, 목회자 부부가 속상할 때가 많습니다. 가정교회를 한다 할지라도,

공동체가 이 단계에 머물러 있을 때는, 리더만 섬깁니다. 멤버들은 섬김을 받기만 합니다.

목장이 이 단계에 있을 때, 목자목녀는 좀 힘들고 버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개척교회가 이 단계일 때

(이 단계가 제법 오래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오래 참고 견디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단계에 있는

목자 목녀들에게 목회적으로 줄 수 있는 도움은, 계속 격려해주고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위로해주는

일입니다. 오래 참고 견디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그때 세 번째 단계가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단계는 목자 목녀의 섬김을 보고 목원 중 누군가가 섬김으로 뛰어든 단계입니다.

목장에서 목자 목녀 외에 멤버 한두명만 섬김에 자발적으로 뛰어들어도 분위기는 아주 좋아집니다.

이것은 목장에서 중간 리더, 예컨대 예비목자 후보가 생기는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때 목자 목녀의

마음이 얼마나 시원해지는지는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모릅니다. (개척교회는 말할 것도 없구요)

목원 중 누군가가 자원하는 단계, 바로 이 단계가 공동체가 일어나고 부흥하는 시작입니다.

이 섬김을 자원한 멤버가 생긴 공동체는 두 번째 단계까지 마치 막혀있던 혈액이 순환되기

시작한 것처럼 힘이 나고 생기가 돕니다. 느헤미야가 바사에서 헌신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이스라엘의 영적 무기력을 보고 지도자들에게 호소했을 때, 그 지도자들이 힘을 모아 일어서기로

결단했을 그때와 같습니다. 이 세번째 단계로 나아가면 리더들은 큰 자신감이 붙습니다.

이 단계에 도달하면, 대개 가정교회 목회자들에게서, 가정교회 참 재미있다는 말이 나옵니다.^^

개척교회에서 이런 일은 거의 기적같은 은혜에 해당합니다. 개척교회는 목사와 사모만이 헌신하는

두번째 단계를 오랫동안 지납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목사와 사모 외에 또 한명의 섬김의 일군이

따라붙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성도가 새벽기도 대원으로 자원하거나, 예배당 청소를 자원하거나

주일점심을 나도 준비하겠다고 자원하거나 이럴 때 목사와 사모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공동체가 이제 부흥을 이제 처음 맛보는 단계입니다. 은혜가 임하여 공동체는 행복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번째에서 세번째 단계로 가는 그 일을 사람이 만들어낼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목원 누군가의 자원하는 섬김을 공동체의 리더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가 없고, 오직 그때와

기한은 하나님께만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인위적으로 그것을 리더가 요구하거나 강요했을 때는,

공동체가 세 번째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칫 반발이나 불평을 가져와 두 번째 단계가

오히려 연장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리더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조급증은 금물입니다.

그러므로 목자와 목녀, 목사와 사모는 그 세 번째 단계가 도래할 때를 인내하며 기다립니다.

그냥 기다리는 게 아니고 기도하고 섬기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일 외에 다른 묘안이 없습니다.

다만 전략적으로, 공동체 안에서 섬김의 시스템을 잘 만들어 우리 공동체 중에 가장 섬김의 마인드로

열려있는 목원과 함께 나눠보는 것은 필요합니다. 섬기고 싶어도 잘 몰라서 못하거나 섬김의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여 안하는 경우도 혹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섬김의 내용을 목자목녀와 그 헌신된 목원이 나누고 먼저 주도적으로 해볼 때에, 섬김의 시스템이

공동체 안에 정착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은 이것입니다. 섬김의 본이 목원들에게

가슴으로 전달되어 ‘나도 저분처럼 해야겠다! 이 결단이 자원하여 생기는 것입니다.

목자 목녀가 두 번째 단계에서 얼마나 지치지 않고 진정성있는 섬김을 보여줬는가 여기에 공동체의

성숙이 달려있지 않나 싶습니다.

 

 

네번째 단계는 공동체에서 대다수가 상호교차적으로 섬김이 이루어지는 단계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공동체가 부흥하여 독수리 날개같이 올라가는 상태입니다.

부흥은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 본질이 아니고 공동체 대다수가 성령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서로를 섬기고, 불신자를 섬기는 일에 헌신되어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숫자가 많아지는 것은 성장이라고 해야지 부흥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공동체가 부흥을 누리게 되면 목자 목녀들은 당연히 헌신적으로 섬깁니다. 그런데 목장에서

목원들도 너도나도 열심을 갖고 섬깁니다. 상호교차적으로 섬김이 이루어지는 단계입니다.

예비목자 후보가 여기저기 나오게 됩니다. 저는 이 단계를 이름하여 파격적 섬김의 공동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파격적 섬김이 이루어지면, 그 섬김을 받는 사람은 충격을 받습니다.

저는 일반적으로, 가정교회를 지속적으로 하는 교회는 세번째 단계를 지나는 때라고 봅니다.

그런데 세번째 단계에서 네번째 단계로 도약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과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공동체의 리더들, 목사 목자 사모 목녀, 그리고 섬김을 시도하는 헌신된 지체들이 또한번

강력하고 새로운 섬김의 도전을 필요로 합니다. 또다른 차원의 희생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최고의 부흥이 도래한 시대는 오순절 성령님이 임하신 이후 사도행전 초대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자적 단계는 구약시대 다윗왕국 시대, 그리고 히스기야 요시야 때의 부흥 정도가

이 단계에 속한다고 봅니다. 포로 후기 에스라 느헤미야 때에 한번 더 마지막으로 임했습니다.

부흥의 때에는 파격적 헌신과 파격적 섬김이 상호교차적으로 나타납니다. 반드시 지도자만이

섬기는 것이 아니고, 목원도 섬기고 심지어 VIP까지도 섬김을 보고 몸으로 실천하게 됩니다.

가정교회가 가장 잘되는 교회들과 목장들을 보면 이 네번째 단계를 즐기는 수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목장에 VIP가 들어올 때, 목자와 목원들의 파격적 헌신과 섬김에 충격을 받게 됩니다.

우리 목회자들이 휴스턴 서울교회 세미나나 연수를 갔을 때, 대부분의 목자들의 상호교차적 섬김,

파격적 섬김을 보고 놀라게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봅니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할까싶은 것입니다.

그런 목자들이 한두명이 아니라, 전설에 가까운 헌신자들이 여기도 보이고 저기도 보입니다.

이것이 우리 대부분의 가정교회들이 현재의 단계에서 지향할 목표지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이것이 신약교회의 회복이라고 믿습니다. 사도행전 2장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파격적 섬김과 파격적 희생은 그것을 경험할 때 서로간에 충격을 가져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바나바의 파격적 헌신, 그리고 믿는 자들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섬김이 이루어집니다.

코이노니아! 서로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기쁨으로 모이고 전심으로 기도하고 예배합니다.

이것을 보고 예루살렘 불신자들이 충격을 받습니다. 이런 모습을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에서

교회가 ‘호감을 샀다’ ‘칭송을 받았다’ 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불신자들이 신자의 공동체의 파격적 섬김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가정교회가 여기까지 가면 그야말로 목회자나 목자나 목원이나 모두가 행복해집니다.

그리고 더한 섬김과 희생이 쉬워질 것입니다. 공동체가 여기까지 도달하는 것이 부흥된 상태,

이것을 가리켜 이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역사적으로 보면, 그렇게 부흥된 공동체의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한 것은 아닙니다.

한때 다윗-솔로몬 왕국이 그렇게 높은 헌신도를 가졌지만, 솔로몬 이후에는 극심한 침체가 왔고

한때 예루살렘 교회가 높이 치솟았지만 나중에는 다른 교회, 안디옥교회가 그렇게 솟았습니다.

공동체의 부흥과 침체는 늘 움직이는 생물과 같으므로, 역사적으로 그 네 번째 단계가 언제나

자동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앞에 어떤 부흥된 공동체든지 긴장해야 할 것입니다.

 

 

다섯번째 단계는 공동체 대다수가 아니라 전체가 한뜻으로 섬김에 몰두하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완전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체의 단계이며,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 반드시 경험하게

될 단계라고 믿습니다. 저는 이땅에서는 어떤 공동체도 이 완전한 섬김의 단계에 도달하게 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목장이나 교회가 이 다섯번째 단계를 이루지 못한다는 말은, 우리가 목회하는

현장이나, 어떤 목장이라도, 모든 목원들과 성도들이 섬김을 체질화하게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목자목녀의 섬김을 보아도 그것을 보고 배우지 않는 지체들이 어디나 있게 됩니다.

여호수아 공동체에 아간이 있었고, 느헤미야 시절에 예루살렘성벽쌓기에 동참하지 않은 귀족들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에도 아나니아 삽비라가 있었으며,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 공동체

안에도 가룟유다가 있었고 바울사도의 선교팀 안에도 세상을 사랑한 데마는 있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가정교회를 해나갈 때, 가정교회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전혀 섬김의 마인드를

배우지 못하는 지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정말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구원받았다면,

백번 양보해서 영혼구원을 받았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화되어가는 것은 매우 더디더나 관심이

없는 정도일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자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십년이나 이십년이 지나면, 우리 공동체에, 오늘 아무리 목양해도 변화되지 않는 교인들이

그때에는 하나도 없고, 백프로 섬김의 마인드로 무장된 성도들만 있게 될까요?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은퇴하는 싯점에도 변화되기를 거부한 지체들은 우리 현장에 여전히 있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목장안에 또는 교회 안에 남아있는 것을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가정교회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땅에 신약의 교회를 회복하는 일을 어찌 쉽다고 말하겠습니까?

저는 가정교회 해보면서 두 번째 단계에서 세 번째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목양의 분깃점이라고 봅니다.

그 분깃점은 물이 끓는 비등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비등점을 통과할 때까지는 희생이 요구됩니다.

한 단계를 올라가는 데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리더의 희생이 있을 때만

그 단계가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섬김의 마인드가 없는 제자들이, 사도행전에 목숨을 두려워

하지 않는 용사들로 변화되는 그 중간에 우리 주님의 십자가 보혈과 죽음이 있었습니다.

최영기목사님이 하신 말씀, '능력은 희생에서 나온다!' 세 번째 단계를 거쳐 네 번째 단계로 나아가기

위하여, 목사와 목자, 공동체의 리더는 끊임없이 섬기고 기다리고 기도하며 희생을 부어야한다고 봅니다.

가정교회, 쉽지 않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이 분명한 목표와 길을 안것만 해도 행복합니다.

가정교회, 신약교회의 회복에 왕도는 없고 섬김만 있을 뿐입니다.